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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빙점 폭설주의보 내린 정초에 대관령 옛길을 오른다 기억의 단층들이 피워올리는 각양각색의 얼음꽃 소나무 가지에서 꽃숭어리 뭉텅 베어 입 속에 털어넣는다, 火酒― 싸아하게 김이 오르고 허파꽈리 익어가는지 숨 멎는다 천천히 뜨거워지는 목구멍 위장 쓸개 십이지장에 고여 있던 눈물이 울컹 올라온다 지독히 뜨거워진다는 건 빙점에 도달하고 있다는 것 붉게 언 산수유 열매 하나 발등에 툭, 떨어진다 때로 환장할 무언가 그리워져 정말 사랑했는지 의심스러워질 적이면 빙화의 대관령 옛길, 아무도 오르려 하지 않는 나의 길을 걷는다 겨울 자작나무 뜨거운 줄기에 맨 처음인 것처럼 가만 입술을 대고 속삭인다, 너도 갈 거니 - 김선우, 「대관령 옛길」 폭설주의보가 내린 정초에 시인은 대관령 옛길을 오른다. 얼마 만에 오르는 길인가. 어릴 때 추억이 묻은 길을 걷는 일은 시간을 다시 사는 일과 다르지 않다. 시인은 “기억의 단층들이 피워올리는/ 각양각색의 얼음꽃”으로 지나간 시간을 표현한다. 기억만큼 감각적인 게 어디에 있을까. 우리는 감각으로 과거를 기억한다. 감각은 과거를 살아있는 현재로 만든다. 살아있는 현재는 지나간 시간에 감각의 꽃을 입힌다. 기억의 단층은 이리 보면 수많은 감각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시인은 소나무 가지에 쌓인 눈덩이(“꽃숭어리”)를 뭉텅 베어 입 속에 털어넣는다. 차가운 기운이 입안을 가득 채운다. 시인은 온몸을 싸아하게 하는 이 기운에 “火酒―”라는 시어를 덧붙인다. 화주는 알코올 도수가 높은 술이다. 온몸을 들끓게 만드는 화주 한 잔이 무의식에 갇혀 있던 시인의 기억을 이 세상에 풀어놓는다. 숨을 멎게 할 만큼 뜨거운 기운이 저 깊은 곳에서 밀려온다. 목구멍과 위장과 쓸개가 천천히 뜨거워진다. 십이지장에 고여 있는 눈물이 울컥 올라올 정도로 시인은 온몸 구석구석으로 퍼지는 열기를 주체할 수 없다. 온몸이 흐물흐물 녹는 것 같다. 얼음꽃은 어떻게 화주가 된 것일까? 시인은 “지독히 뜨거워진다는 건/ 빙점에 도달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쓰고 있다. 빙점은 사물이 어는 지점이다. 지독히 뜨거운 감각과 사물이 어는 지점은 어떻게 이어질 수 있는 것일까? 시인은 지금 한겨울의 대관령 옛길을 오르고 있다. 옛길을 오를 때마다 기억 속에 묻힌 얼음꽃들이 하나하나 떠오른다. 쉽게 녹지 않는 얼음꽃이다. 무의식에 새겨진 기억 이미지는 때가 되지 않으면 의식 위로 떠오르지 않는다. 단단하게 얼은 이 기억을 불러내기 위해 시인은 화주를 마신다. 얼음꽃이라는 화주. 차가움과 뜨거움이 맞물리는 자리에서 무의식에 가라앉은 기억이 의식 세계로 밀려들어오는 셈이다. 발등에 툭 떨어지는 붉은 산수유 열매에서 시인은 지독하게 한 시절을 견딘 생명을 보고 있다. 산수유 열매는 서리가 내린 다음에나 수확한다. 서리가 내리는 계절에 붉은 열매를 피운 산수유를 떠올려 보라. “붉게 언 산수유 열매 하나”에서 시인은 뜨거움과 차가움이 교차하는 생명의 역설을 본다. 시인은 차가움이 극도에 이른 대관령 옛길에서 뜨거웠던 시절을 떠올린다. 빙화가 핀 대관령 옛길은 온통 하얀 색으로 뒤덮여 있다. 드문드문 붉게 언 산수유 열매가 보이지만, 그것은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떠오르는 이미지만큼이나 희미하다. “때로 환장할 무언가 그리워져” 찰나도 견딜 수 없는 때가 있다. 화려한 시절을 거치고 낙엽 지는 시간마저도 보낸 시인은 “아무도/ 오르려 하지 않는 나의 길”을 가기 위해 각양각색의 얼음꽃을 피운 대관령 옛길로 들어선다. 시인은 대관령 옛길을 걸으며 흰 눈에 덮인 붉은 기억들을 하나하나 호명한다. 빙점에 도달한 존재만이 지독히 뜨거웠던 인생을 이해할 수 있다. 극과 극은 통한다던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삶을 산 사람들은 미칠 수 없는 자리에 뜨거운 줄기를 품은 채 한겨울을 견디는 겨울 자작나무가 있다. 자작나무는 한겨울을 견디며 새로운 시작을 준비한다. 죽음의 계절에 새로운 시작을 준비한다는 게 묘하지 않은가. 겨울이라는 시간을 거치지 않으면 생명은 봄을 맞이할 수 없다. 봄과 여름을 살려면 겨울을 먼저 견뎌야 한다. 봄과 여름과 가을 다음에 겨울이 오는 게 아니라, 겨울이 온 다음에 봄과 여름과 가을이 온다. 지독히 뜨거운 여름을 지내려면, 빙점에 도달한 차가운 겨울을 보내야 한다. 빙점에 이르기 위해 땡볕이 내리쪼이는 뜨거운 여름을 견딘다고 말해도 좋겠다. 시인은 겨울 자작나무의 뜨거운 줄기에 가만히 입술을 댄다. 차가우면서도 뜨거운 생명의 기운이 느껴지는 찰나, 시인은 속삭인다. “너도 갈 거니?” 2. 그녀 그녀를 지날 때 할머니는 합장을 하곤 했다. 어린 내가 천식을 앓을 때에도 그녀에게 데리고 가곤 했다. 정한 물과 숨결로 우리 손주 낫게 해줍소. 그러면 나무는 솨아, 솨아아 소금내 나는 바람을 일으키며 내 목덜미를 만져주곤 하였다. 오래된 은행나무. 노란 은행잎이 꽃비 내리는 나무 아래 할머니가 오줌을 누고 계셨다. 반가워 달려가니 머리가 하얀 할머니는 엄마로 변해 있었다. 참 이상한 꿈길이지. 오줌 방울에 젖은, 반짝거리는 은행잎이 대관령 고갯마루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죽었다고, 시름시름 앓더니 어느 날 벼락을 맞았다고 했다. 그 땅에 새 길이 포장될 거라고, 길이 나면 땅값이 오를 거라고 은근히 힘주어 한 사내가 말하였다. 이상도 하지, 자살이란 말이 떠오른 건. 꿈 없는 길, 인간에 절망한 그녀의 자살의지가 낙뢰를 불러들였는지도 몰라. 부러진 가지, 그녀가 매달았던 열매 속에서 피 흘리는 엄마들이 걸어 나왔다. 대관령을 넘으며 내가 꾼 낮꿈은 엄마가 나를 가질 때 꾸었다는 태몽과 닮아 있었지만, 오래된 은행나무, 그녀를 몸 삼아 산보하던 따뜻한 허공의 틈새로 절룩거리며 걸어오는 늙은 오후가 보였다. 순식간에 늙어버린 대기의 주름살 속으로 반짝거리며 사라져가는 태앗적 내가 보였다. - 김선우, 「어미木의 자살 1」 그녀는 오래된 은행나무이다. 그녀를 지날 때면 할머니는 늘 합장을 하곤 했다. 은행나무를 향해 합장을 하며 할머니는 무엇을 빌었을까? 사물을 신령(神靈)으로 보는 마음은 사물과 나를 구분하지 않는다. 할머니는 천식을 앓는 아이를 은행나무 앞으로 데려간다. 깨끗한 물 한 사발을 나무 앞에 놓고 할머니는 따뜻한 숨결로 소원을 빈다. 그러면 나무는 솨아, 솨아아 소금내 나는 바람을 일으키며 아이 목덜미를 만진다. 나무가 보내는 바람은 할머니 숨결처럼 따뜻하다. 아이는 은행나무를 할머니의 숨결로, 소금내 나는 바람으로 기억한다. 몸에 새겨진 감각이라고 표현하면 어떨까. 기억이 시적 현재로 거듭나는 순간에는 언제나 감각이 개입한다. 김선우는 온몸을 들뜨게 하는 할머니의 숨결로 시를 쓴다. 언어 너머에서 할머니는 숨을 쉬고 기도를 한다. 그녀의 시가 언어 너머에서 반짝이는 이유이다. 오래된 은행나무는 시간으로는 갈무리할 수 없는 흔적을 지니고 있다. 오래된 은행나무는 오래 전에 죽은 할머니와 이어져 있다. 영혼과 영혼이 이어진 것이라고 말해도 좋다. 시인은 노란 은행잎이 떨어지는 나무 아래서 오줌을 누는 할머니를 꿈속에서 본다. “반가워 달려가니 머리가 하얀 할머니는 엄마로 변해 있었다.” 할머니는 엄마이다. 엄마가 할머니로 변한 거라고 말해도 상관없다. “참 이상한 꿈길이지.”라고 시인은 쓰고 있지만, 사실 시인은 이 이상한 꿈길에서 시적 영감(靈感)을 얻고 있다. 영감이란 문자 그대로 신령스런 느낌을 의미한다. 오래된 은행나무는 왜 신령스러운 것일까? 인간의 시간을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오줌 방울에 젖은 은행잎이 햇빛에 반짝거리며 대관령 고갯마루로 날아오르는 장면을 상상한다. 오래된 은행나무는 이쪽과 저쪽 사이에 있다. 꿈과 현실이 구분되지 않는 백일몽이 아니면 시인은 오래된 은행나무가 일으키는 상쾌한 바람을 느낄 수 없다. 오래된 은행나무는 시름시름 앓다가는 어느 날 벼락을 맞고 죽었다. 벼락을 맞고 죽은 건 은행나무의 운명인 것일까? 시인은 은행나무가 있던 땅에 새 길이 날 것이고, 그러면 땅값이 오를 거라고 힘주어 말하던 한 사내를 떠올린다. 사내는 은행나무를 신령스런 존재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은행나무가 사는 땅을 자본의 가치로 환원한다. 은행나무가 사는 삶터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삶터에 매겨진 물질적 가치가 중요하다. “인간에 절망한 그녀의 자살의지가 낙뢰를 불러들였는지 몰라.”라고 시인은 이야기한다. 은행나무가 일부러 벼락을 불러들인 거라는 시인의 생각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부러진 가지에 매달린 열매 속에서 “피 흘리는 엄마들이” 걸어 나오는 걸 시인은 보고 있다. ‘엄마들’은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들을 가리킨다. 오래된 은행나무의 죽음은 그 나무에 서린 할머니들의 죽음을 불러낸다. 할머니들이 죽으면 시인이 기억하는 감각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오래된 은행나무가 사라지면 할머니들로 이어진 오래된 기억 또한 사라지게 된다. 할머니에서 할머니로 이어진 기억에는 천식에 걸린 어린아이의 목덜미를 만져주던 바람의 감각이 새겨져 있다. “피 흘리는 엄마들”의 끔찍한 형상에 드러나는 대로, 우리는 더 이상 그런 감각을 더 이상 느낄 수 없는 세상을 살고 있다. 시인은 “대관령을 넘으며 내가 꾼 낮꿈”이라는 시구로 할머니의 감각과 단절된 우리네 상황을 표현한다. 오래된 은행나무는 이제 “따뜻한 허공의 틈새”로만 남아 있다. 그 틈새로 “늙은 오후”가 절룩거리며 걸어온다. 흐르는 시간이다. 흐르는 시간 앞에서 무엇인들 늙지 않을 수 있을까? “순식간에 늙어버린 대기의 주름살 속”에서 시인은 “태앗적 내”가 반짝거리며 사라지는 광경을 언뜻 들여다본다. ‘태아 때 나’는 할머니의 감각으로 이 세상을 살았다. 아이는 할머니를 따라 오래된 은행나무 앞에서 기도를 했다. 깨끗한 물 한 사발을 떠놓고 깨끗한 마음으로 아이는 은행나무가 내는 상쾌한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이는 온몸으로 은행나무를 느낀다. 이 느낌 속에서 아이는 시간을 잊는다. 할머니가 엄마로 변하는 세계에 시간이 작용할 리 없지 않은가. 시인은 아이와 엄마와 할머니가 하나가 되는 세계를 대관령을 넘으며 꾼 꿈속에서 엿본다. 낮에 꾼 꿈이니 백일몽(白日夢)이다. “엄마가 나를 가질 때 꾸었다는 태몽”과 닮은 이 꿈을 통해 시인은 아이와 이어지고, 엄마와 이어지고 할머니와 이어진다. 주름살 진 대기 속으로 사라지는 “태앗적 나”는 이리 보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여전히 떠도는 실재와 같은 사물인지도 모른다. 오래된 은행나무가 남겨놓은 흔적이라고 말해도 좋다. 아주 오래 전부터 할머니에서 할머니로 이어져 내려오던 이 흔적=감각을 시인은 목덜미를 스치는 바람의 감각으로 되살리고 있는 셈이다.
강릉에서 태어나 96년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대관령 옛길 등을 발표하며 시단에 나와 시힘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신예 김선우 시인의 도발적이고 관능적인 첫 시집. 이제 너무도 흔한 용어가 되어버린 생명성, 여성성이 단지 말로만이 아니라 강렬하고도 풍요로운 이미지로 형상화되어 읽는 이의 눈 앞에 펼쳐진다.
제1부
1. 대관령 옛길
2. 어라연
3. 양변기 위에서
4. 꿀벌의 열반
5. 엄마의 뼈와 찹쌀 석 되
6. 목포항
7. 그녀의 염전
8. 또 누가 이 밥그릇에 누웠을까
9. 벌집 속의 달마
10. 어미목의 자살 1
11. 무꽃
12. 어울목
13. 간이역
14. 선운사, 그 똥낭구
15. 가을 구름 물속을 간다
제2부
16. 얼레지
17. 무덤이 아기들을 기른다
18. 입춘
19. 내력
20. 둥근 기억들의 저녁
21. 술잔, 바람의 말
22. 산청 여인숙
23. 포구의 방
24. 물속의 여자들
25. 봄날 오후
26. 해질녘
27. 내 뒤에서 우는 뻐꾹새
28. 헤모글로빈, 알코올, 머리칼
29. 점
제3부
30. 연밥 속의 불꽃
31. 관계
32. 그 마을의 연못
33. 만약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
34. 맑은 날
35. 쥐덫
36. 숭고한 밥상
37. 만국의 바퀴벌레여
38. 무정자 시대
39. 할머니의 뜰
40. 빈집
41. 어미목의 자살 2
42. 애무의 저편
43. 할미꽃
제4부
44. 떴다, 비행기
45. 사랑의 거처
46. 운주에 눕다
47. 집이 서늘하다
48. 왕모래
49. 북엇국
50. 고바우집 소금구이
51. 아나고의 하품
52. 분꽃
53. 도솔암 가는 길
54. 좁은 문
55. 나팔곷
56. 꽃밭에 길을 묻다
57. 고드름
58. 백목련 진다
59.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
60. 해설 : 김춘식
61. 시인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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