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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외출

jvfa 2023. 5. 12. 22:51

그곳에 가면 나를 만날 수 있다 삶이 팍팍하게 느껴질 때 사람들은 무엇을 할까? 운동을 하거나 등산을 하던지 아니면 술자리를 만들어 거하게 취하는 등 사람에 따라 무수한 방법들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방법들을 총 동원하더라도 위로 받지 못하는 경우라면 돌파구는 없는 것일까? 때론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장소에서 가슴에 스며드는 따스한 온기에 스스로 놀라 주변을 돌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사람을 위로하는 것이 커다른 무엇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내게도 그런 공간이 있다. 내가 사는 도시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인적이 드물지만 찾을 때마다 온화한 미소로 반겨주는 그런 곳이다. 내가 처음 그곳을 찾았을 때는 농사짓는 논 한가운데 덩그러니 몸체만 겨우 유지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최소한의 대책을 마련해 두었다. 승용차로 들어갈 수 있으나 걸어가면 더 좋은 길을 따라 가는 동안 산과 들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풀과 나무들이 있어 눈길을 사로잡기도 한다. 보물 제111호인 개선사지 석등이 있는 곳이다. 폐사지에 석등만 덩그러니 남아 있지만 석등이 보여주는 기품은 가히 일품이라 할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천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도 아름다움이 여전하다. 무생물인 돌로 만들었지만 그 안에 담긴 사람들의 소망이 남아 시간을 거슬러 그 뜻을 보여주고 있는 듯 온화하고 생생함이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그 때문인지 마음이 지치고 기운이 빠지는 날 그곳에 가면 지친 마음에 잔잔한 위로를 받곤 한다.   특정한 공간이 삶에 지친 사람에게 주는 독특한 매력 때문에 반복해서 찾는 사람들이 있다. ‘낯선 공간이 나에게 말을 걸다’라는 부재를 단 ‘어떤 외출’이라는 책이다. 이 책은 건축가, 소설가, 여행작가, 영화감독, 칼럼니스트, 일러스트 작가, 정원 전문가 등 창조적인 활동을 하는 열여덟 명의 사람들이 자신만의 장소에서 느끼는 다양한 감정을 담아내고 있다. 자신만의 장소라고는 하지만 잠실야구장이나 실상사, 강진의 다산초당처럼 이미 사람들 사이에 이미 익숙한 공간도 있고, 서귀포 대평박수 큰홈통 같은 제주도의 이름 없는 바닷가도 있고, 이제는 도심의 기능을 상실했지만 추억이 살아 숨 쉬는 카페나 식당도 있다. 그야말로 자신만의 공간이라는 특수성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오직 자신만이 느끼는 감정이 살아 숨 쉬는 곳이기에 이러한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처럼 장소 또는 공간은 그곳만이 간직한 독특한 정서가 있고 그 정서에 공감하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경험을 하게 만든다. 이 특별한 경험은 아마도 자신이 살아온 시간 동안 가슴에 묻어 두었던 아픈 상처나 아련한 추억 같은 것들이 그 장소나 공간이 전하는 이미지와 소통하는 과정에서 맺어진 인연이라 생각된다.   현실의 삶은 만만치 않다. 이런저런 일상의 일로 치인 팍팍함이 있어 힘겹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어 쉬어갈 수 있다면 삶이 그리 고단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 공간이나 장소가 사람들에게 유명한 곳이거나 이름난 곳이 아니어도 좋을 것이다. 내 안에 담긴 정서와 소통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좋을 것이다. 이런 공간이 있다면 열여덟 명의 저자들이 간직한 마음의 위안을 받는 장소와 다름없는 자신에게 특별한 시간을 제공해 줄 것이다. 그것도 자신이 살아가는 가까운 곳에 있다면 자주 찾아 지친 마음에 쉼과 휴식의 시간으로 살아갈 날들에 대한 설렘이 함께하지 않을까 싶다.   사족하나 달고 가자. 책을 읽다보면 역사적 사실이 왜곡되는 것을 접하곤 한다. 이 책에도 그런 부분이 있다. 김준엽의 ‘강진 다산초당 : 상실과 절망을 딛고 선 땅’에 보면 정약용의 형 정약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정약전이 유배를 가서 생을 마감한 곳이 신지도로 나오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정약전에 신지도로 유배를 간 것은 사실이나 그곳에서 유배지를 옮겨 자산어보를 지은 흑산도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 부분에 대한 확인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상처 받은 영혼들의 마지막 도피처를 탐닉하다알랭 드 보통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우리의 일그러진 본성을 바로잡아주고 우리를 지배하는 일들로 인해서 희생된 감정들을 되살려주는 능력 때문에 어떤 건물(공간)들을 귀중하게 여긴다. 낯선 공간은 일상생활에서 과잉된 부정적 감정들을 누그러뜨리고 결핍된 긍정적 정서와 에너지를 채워준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이유이자 인간의 본능이다. 그런데 어디로 떠날까? 이 책은 건축가, 소설가, 여행작가, 영화감독, 칼럼니스트, 일러스트 작가, 정원 전문가 등 창조적인 일을 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공간과 나눈 대화’의 기록이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할 뿐이지 공간도 우리에게 말을 건다. 한 시간, 아니 단 1분이라도 공간과 대화할 줄 아는 이라면 이 세상의 풍요와 여유, 행복을 누릴 만하다. 그곳이 특별한 장소가 아니더라도 온몸의 감각과 마음의 문이 열린다. 섬세한 눈과 마음을 가진 열여덟 명의 작가들이 자신의 결대로 공간을 음미하고 해석하며 우리의 외출 본능을 일깨운다.이 책에서는 산과 들과 강이 그림처럼 어우러진 거대한 ‘정원’(하동 평사리 악양들판), 전망 좋은 곳의 오래된 호텔 객실(설악산관광호텔), 도심 속 사찰(성북동 길상사), 제주도의 이름 없는 바닷가(서귀포 대평박수 큰홈통), 동네의 카페들(대학로 카페 장, 교하 in 커피발전소, 전주 납작한 슬리퍼), 관중들이 빽빽이 들어찬 잠실야구장의 외야석 등을 ‘크리에이티브한’ 작가들이 독특한 시선으로 탐닉한다.

하동 평사리 악양 들판 : 천 년의 정원 -이동협
통도사 가는 길 :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 놓인 다리 -이장희
잠실야구장 : 대폭발 직전의 행성을 탈출하는 마지막 우주선 -김은식
서귀포 대평박수 큰 홈통 : 그래서 사는 날은 모두 꽃 같다 -고선영
홍대앞 옥상상점 : 크리에이티브한 일을 하는 사람들의 베이스캠프 -차우진
양구 방산자기박물관 :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 -이진오
파주 교하 그리고 커피발전소 : 공간에 대한 내 첫사랑 -김윤경
천안 광덕산 호두마을 : 날숨의 공간을 찾아서 -김범진
설악산관광호텔 : 그 자리에 원래부터 있었던 공간 -오영욱
전주 삼백집 옆 납작한 슬리퍼 : 기억의 공간 옆 꿈의 공간 -시민케이
성북동 길상사 : 말 없이 소리 없이 머물 수 있는 -시와
강진 다산초당 : 상실과 절망을 딛고 선 땅 -김준엽
수성동 기린교 : 지금 그리고 여기 -하성란
대전 산타크로스 : 가난하고 지독했던 게으름뱅이들의 시절 -김영진
여다지 해변과 천관산 : 더 나은 내일로 향하는 기차 -박동철
대학로 카페 :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곳 -장유정
장충동 평양면옥 : 슴슴한 사람들의 슴슴한 삶 -천경환
동구릉 : 왕릉들 사이로 난 숲길 -형건